[연성교환] 마스터피스

✔️ 2021. 10. 17.

이로하가 베네치아에서 돌아왔다.

 

 

사랑하는 린, 이제 잘 시간이야. 혼자 지내느라 힘들었죠? 외롭지는 않았어? 친구를 데려와서 밤늦게까지 파티를 열어도 좋았을 텐데, 얌전히 집을 지키고 있었군요. 새 파자마는 갖춰 입었나요. 첫 번째 단추가 어긋나 있잖아. 자……이제 괜찮죠? 아니, 오늘은 네 침실에서 자는 게 아니야. 따라와. 이 층에서 이야기해요. 차를 끓일 필요까지는 없고, 아 여기 걸어둘 새 그림을 사 올 걸 그만 깜빡했네……발밑 조심해요. 캐리어? 아직 차에 있어요. 한둘이 아니라서 중요한 물건만 조금 옮겼어요. 맞아요, 그중 하나를 보여주고 싶어서. 물론 선물도 따로 사 왔고. 여행은 좋지? 새로운 곳에서 모르는 사람들을 만나고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음식을 접하고 처음 듣는 노래에 이끌려 따라가면 평생 꿈도 꾸지 않았던 풍경을 만나는 거예요. 그리고 자신이 무엇 때문에 그곳에 도착했는지, 어떤 일을 하고 싶어 했는지 누구였는지조차 잊어버린 채 돌아갈 곳 따위 없다고 느끼게 돼. 훌륭한 여행자는 자신이 이방인이라는 비밀을 망각해야만 하는 거야. 그래도 린, 탄식의 다리를 거닐고 무라노 섬의 유리 공예품을 구경하고 산 마르코 광장을 지나치는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카페에서 들려오는 피아노 선율에 젖어 있는 동안 나는 결코 네 생각을 빠트린 적이 없었어…….

 

 

이어서 화자는 회상한다. 햇빛이 셀로판지처럼 내리비치지만 희미한 비가 내리던 이른 오후였다. 박물관 일 층에서 작은 경매를 열고 있었다. 많은 이들이 낡고 녹슨 반지 하나를 갖기 위해 안달이었다. 그는 점차 높아져 가는 입찰가를 바라보다가, 자신의 집, 린과 함께 살기 위해 쌓아 올린 사랑의 성을 떠올려냈다. 이 층 복도 끝의 방, 세 개의 자물쇠가 달린 문 속의 황홀경. 세상을 돌아다니며 수집한 예술품들에는 그의 탐미주의적 직관이 담겨 있었다. 저명한 화가의 신작부터, 거리 노점의 수공예품까지 종류나 가치를 불문하고 그러모은 반짝임. 얼핏 보기에 주제성이 없는 진열의 비밀은 어느 아이에게, 그의 유일한 가족에게 내재되어 있었다. 부드러운 검은 공단 위 놓인 하얀 진주 반지는 바로크 시대의 물건이라고 했다. 보석을 감싼 헤드에 정교한 나뭇잎 문양이 새겨져 있고, 링은 두 번 꼬아 뱀처럼 유연한 형태였다. 그는 어제 린의 보랏빛 눈을 닮은 유리 장미와 그것을 꽂아둘 연분홍빛 도자기를 손에 넣었다. 그러나 진주 반지에서는 무엇도 떠올려낼 수 없었기에 곧바로 발걸음을 돌려 어딘가로 향하기 시작했다.

 

 

이로하는 상냥한 사람이었다. 그는 내게 돌아올 곳을, 이름을, 가족이라면 응당 받아야 할 사랑을 아낌없이 베풀었고 나는 그의 기대에 부응하여 반짝이는 것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행위라고 여겨왔다. 피그말리온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가? 만약 나츠메 이로하가, 너는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부모에게서 태어난 것이 아닌, 나의 석고 조각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말했더라면 나는 그 이야기를 망설임없이 믿었을 것이다.

나는 늘 혼자였다. 외로웠다.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란 후회 다음엔, 그 말에 동의해줄 사람조차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음으로써 비참해지는 마음이 있었다. 자신이 외로웠다는 감각마저 생의 욕구 아래 서서히 잊힐 즈음 나츠메 이로하를 만났다. 나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 역시 고독한 인물이었다. 그는 평생 원하던 자신의 피조물, 미에 대한 욕망을 망설임 없이 적용할 상대를 찾아낸 후에도 종종 고독 속에 잠기려 했다. 뜨거운 물을 가득 채운 욕조에 들어가 밤의 바다처럼 차갑게 가라앉을 때까지 나오지 않으려 했다. 목욕으로 마음을 위로하기에 불충분하다면 여행을 떠났다. 몇 주치 일정을 모조리 취소하고, 비행기를 타고, 나는 들어보지도 못한 곳으로 향해 수많은 예술품을 갖고 돌아왔다. 그리고 내가 상기된 표정으로 열 개가 넘는 선물 포장을 뜯고 있을 때 이로하는 살며시 어디론가 향했다. 이 층의 굳게 잠긴 방이었다.

 

 

열쇠가 세 번 맞물리는 소리가 나더니 문이 열린다. 두 사람은 방에 들어선다. 성경에서 말하는 심판의 장면을 묘사하기 위해, 세 대에 걸쳐 만들어졌다는 카펫 위 그들의 발걸음이 스친다. 실내는 작은 창 하나 없이 어두웠으나 수백 점의 시계, 목걸이, 액자, 작은 조각상 따위의 거친 면과 부드러운 면, 반짝이는 면과 투명한 면이 서로를 응시하여 생겨난 작은 빛무리들이 허공을 떠돌며 방문자의 두 눈을 밝혀주었다. 린이 말한다. 「여기 처음 들어와 봐.」

 

「이렇게나 모았구나.」

「알겠어요?」

「무엇을?」

「공통점을…자, 제대로 보세요. 지금 불을 밝힐 테니까.」

 

그러더니 어디선가 성냥을 꺼내 은제 촛대 위 짧은 양초에 불을 올린다. 해가 뜨듯 순식간에 주변이 밝아진다. 린은 주의 깊게 수집품들을 살폈다. 호흡, 발걸음, 스치는 옷깃에 민감한 촛불이 일렁일 때마다 그림자 두 개가 불규칙적으로 시야 뒤편을 가리며, 아름다운 것들의 새로운 면을 부각시켰다. 린은 바다 깊이 잠겨 머리 위로 한없이 올라가는 공기방울들을 바라보는 것만 같다고 여겼다. 「이로하, 나는 잘 모르겠어……. 하지만 마치 천국에라도 와 있는 것 같아. 이제 무언가를 더 놓으려면 이걸 치워야 하겠는걸. 잠깐 놔둔 물건 맞지?」 그의 시선은 방 중앙의 투박한 나무 상자로 향한다. 이야기 속 보물상자처럼 꾸며진 함(函)은 어느 주점 창고에나 있을 법한 디자인으로, 여타 물건들과는 썩 어울리지 않았다. 이로하는, 린이 더 나은 대답을 하길 기다리겠다는 듯 샐쭉한 표정으로 침묵을 지킨다. 린은 익숙하다는 듯 관처럼 커다란 상자 손잡이를 잡고 뚜껑을 젖혔다. 그 속엔, 분명 자신의 침대에 깔려 있었을 이불과 늘 안고 자던 인형 하나가 놓여 있다. 「어?」 짤막이, 얼빠진 감탄사를 뱉은 입은 다음 문장을 뱉지 못했다. 촛불이, 그림자가, 시야 전체가 흔들린다. 불안에 요동치는 눈동자가, 관측 가능한 천체를 모두 표현하여 제작되었다는 어느 시계의 은색 추에 담긴다. 시계추가 느릿하게, 휘청거리는 몸을 가로질러 왕복하고 열 두 시를 알린다.

그의 몸이 천천히 기울어지다, 이내 바닥에 쓰러진다.

 

 

어디까지 이야기했지? 아, 늘 네 생각을 했다는 대목까지였나.

다음엔 대성당으로 향했어. 긴 나무 의자 앉아 기도하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고행자의 마지막 깨달음과 그 환희가 서려 있었지.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깨지기 쉬운 물건들과 항공 우편, 다음 여권 재발급 따위의 복잡한 절차에 대해 사사로이 고민했어. 그런 잡념을 씻어내리겠다는 듯 오르간 음색이 울리지 않았더라면, 너는 지금 침실에 누워 있었을 거야. 잠들기 전까지, 『베니스의 상인』을 읽어줄까? 꿀을 탄 우유를 마시는 걸 잊으면 안 되지. 하지만 이미 마셨던가요,

린.

아무 의심 없이 내가 주는 것들을 받는 네가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어. 아직 잠들지 마. 그래, 파이프오르간이 울렸어. 내가 들었던 음악이 무엇이었는지 사실은 잘 기억나지 않아. 바흐의 파스토랄레였던가? 어쩌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선율이 물의 도시 깊은 곳에 잠들어 있다가 햇빛의 마법을 통해 잠깐 그 성당에 머물다 간 것일지 몰라……너도 알지, 경험의 본질은 경험보다 우선시될 수 없다는 걸. 무척이나 아름다운 것 앞에서 사람은 단순해지지. 연주는 멋졌어. 훌륭했어. 복잡한 기교 없이 정직히 차례대로, 악보 끝까지 달려 나가는 음색. 연주자의 숨소리와 페달의 소음마저도 나는 작곡가의 의도를 완벽히 읽어낸 장치라고 느낄 수 있었어. 중요한 건 말야. 앞으로 다시는 같은 소리를 들어볼 수 없겠다는 짧은 이해. 그 발상으로부터 비롯된 모든 절망에 있었어.

이 방에 있는 수집품들은 말이야, 전부 널 그리며 모은 거야. 네 머리카락, 눈, 품성, 과거, 현재, 미래, 상처, 꿈들을 떠올리며 하나씩 채운 방. 따라서 이곳엔 〈나츠메 린〉이 충만하지만, 이전까지는 진정한 네가 존재하지 않았지. 왜냐하면.

 

 

그는 극본을 너무 빨리 읽어버린 배우처럼 잠깐 멈춘다. 격양된 어조와 붉어진 뺨을 제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다가, 호흡처럼 다음 말을 이었다. 

 

 

난 알아차렸어. 살아있는 아름다움 따위는 유행이 지났다는 걸. 진정한 신은 죽음 속에서만 우리를 내려다보지. 린, 무언가를 영원히 고상하게 추억하고 싶다면 그걸 자신만의 어둠 안에 가둬야만 해. 어제까지만 해도 너는 나의 베틀 위에 놓여 있었지. 내가 발견한 최고의 반짝임이었어. 어쩌면 좀 더 지켜보는 것으로 여태 목격한 적 없었던 경지에 도달했을지도 몰라. 나는 전 세계를 네 색으로 물들일 카펫을 짤 수 있었을지 몰라. 하지만 신 앞에서, 멈춰버린 시간과 영원성 앞에서 일어나지 않은 미래에 대한 토의는 하등 쓸모없고 의미 없어. 신 앞에서는 기적만이 현실성을 가지니까.

아, 너는 드디어 나의 신이 되는 거야. 나를 이해할 수 있어? 이해하지 못해도 관계없어. 배우는 배역을 이해하기 위해 극에 삶을 바치지만, 일개 배역이 배우를 이해할 수는 없는 법이지.

 

 

「그러니까 잘 자, 린.」

그것이 자신의 걸작이었음을 잊고 신체(神體) 앞에 무릎을 꿇은 자가 나지막이 웃는다. 그는 신의 창백한 뺨에 짧게 입 맞춘다.

상자를 닫는다.

그렇게 모든 것은 완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