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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tch Black Night

Etc/Novel

2023. 10. 27.

검은 잉크 한 방울에 물드는 바다처럼 중요한 기억이 사라져간다.
글쎄. 분명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겠지. 누구라도 상관 없어. 당장 벗어날 수만 있다면….
그리고 아무리 나아가도, 새벽은 밝아오지 않습니다.


2023년 6월 1일.

친구였던 자에게 고백을 들었다. 그는 자신이 달 뒷면에서 온 괴물이라 털어놓았다. 인류의 시초부터 살아왔으나 종장까지 단 한 순간도 인간일 수 없을 자가 고하길, 자신의 존재를 이 세상에서 소멸시키지 않으면 노아의 방주를 능가하는 대재앙이 재래할 것이라고. 나는 신뢰하지 않으려 했다. 그가 무언가를 버티다 못해 미쳐버렸다고 생각했다. 징조는 있었다. 일상적인 대화에 묻어나는 우울감이나 무력함, 삶에 절망하는 듯한 어조에서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는 무언가 〈다른〉 사람이다. 그러니까 이 관계는 언젠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와해되고 말 것이다. 그러니까.
「나를 다시는 열리지 않을 만큼 무거운 관에 넣고, 누구도 찾지 않을 만큼 깊은 바다에 가라앉혀줘.」
라고, 시릴 메이스필드가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당장 내일이라도 세계를 파괴해버리고 말 거야.」
「협박하는 거야?」
「아니. 걱정하고 있는 거야.」
「걱정되는 건…네 쪽이야. 언제부터 그런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어?」
「너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알고 싶지도 않은데.」 이때의 나는 분명 잔뜩 질린 표정을 하고 있었으리라. 「어차피 전부 거짓말이지?」
「유감스럽지만, 아니….」
 
우리는 도시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신축 백화점 옥상의 카페에 앉아 있었다. 윤곽이 희미한, 큰 구름이 느리게 지나치며 사람들의 옆얼굴에 그림자를 남겼다. 지구의 위성 역시 일광의 경계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여름의 조각이 공중에 잘게 흩뿌려진, 유리 파편처럼 잔존하는 계절. 
「도와주지 않을 거야?」
「도와줄 리가 없잖아. 자살 같은 걸.」
「자살하고 싶은 게 아냐.」
「그럼?」
「인간이 아닌 것의 죽음은 그렇게 부르지 않으니까.」
「너…….」 
「역시 거짓말인 편이 좋니? 그냥 이대로 살아가다가 전부 무너져 내려서, 하늘과 바다가 사라진 불의 세계에서 혼자 남아서 그때 사라지는 편이 나았다고 후회하는 편이 좋을까.」
「병원에는 가 봤어?」
「단테. 너는 종말의 때에도 살아남고 싶어?」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들어라.」
「대답해줘.」
「…아무도 살 수 없게 되잖아? 종말이 오면.」
 
「이후를 가정해봤자 무의미할 뿐이야.」 그리고 테이블 위에는, 상대가 빌려주겠다 말한 양장본 한 권과 다 식어버린 커피 두 잔이 올려져 있다. 문득 그의 연설이 눈앞의 책과 관련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페이지를 넘기면, 그것은 흔해 빠진 고전 로맨스 소설책일 뿐이다. 목차의 단편들도 전부 알고 있는 작품이었다. 어째서 빌려주는지 질문하지 않으려 했다. 일상의 피로감과 반복되는 규칙 따위에 얽매인 삶이 천천히 자신을 갉아먹고 있음을 앎에도, 당장 해결법이 없어 내버려 두는 것처럼. 잊힐 시간 속으로 내게 주어진 이야기도 지금의 대화도 흘려보내려 했다. 그렇기에 캐묻는 것을 그만두었다.
 
「만약 이곳이 사람이 살 수 없는 행성이 되더라도 너만은 살려줄 수 있어. 내겐 그럴 능력이 있으니까.」
「그 능력으로 당장의 삶을 평범하게 살겠다는 발상은 못 하는 거야?…필요 없어.」
「그렇게까지 거절한다면. 그래, 알겠어. 없던 일로 하자. 본래 〈그때〉란 아무런 계시 없이 찾아오고, 사람의 예측이나 희망으로 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상대는 잔이 놓인 트레이를 들고 일어섰다. 갑작스럽게 마무리되어버린 대화를 이어나갈 마음 따위 들지 않아, 나는 잠자코 그의 뒤를 따를 뿐이었다. 이후에는 어떤 대화를 하고 무엇을 하다 헤어졌는지조차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손목시계를 새로 사고 싶은데 고르는 것 좀 도와줄래?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에서 시릴이 그렇게 말했던 것 같기도 하고. 당장 내일 죽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이 손목시계라니. 만에 하나 싶어 다음 날 저녁 에리카에게 연락해보았으나, 그런 전조는 없었다고 웃음거리 취급당할 뿐이라, 나는 어느 순간부터 그 오후의 경험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어느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창밖으로 올려다본 하늘엔 태양도 달도 없었다. 지천에 존재하는 것은 비명과 죽음뿐. 종말은 돌연히 찾아왔다. 그것이 신의 뜻이라는 사실을, 세계에서 나 혼자만이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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