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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편지

Etc/Novel

2024. 2. 17.

수많은 생명을 희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주 바깥으로 갈 수 없었고, 대폭발의 원인조차 알아내지 못했다. 어쩌면 우연히. 아무도 원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계는 태어났다.
그렇다면 그건, 책의 페이지를 넘기며 피부와 종이가 맞닿을 때 생겨난 것일지도 모르고 누군가의 말다툼이 시초인 것일지도 모르겠네. 언제든 다시 개막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세계의 운명이라는 건.

무엇을 하면 좋을지 한참이나 고민했다. 너무나도 자유로워서 오히려 부자유스럽다. 처음으로 죽음 외의 선택지가 무한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그 이야기를 건넬 상대가 이제는 없다. 나는 분명 눈앞에 더 절망하고 있는 사람이 존재하니까 여유롭게 생각할 수 있었던 거야. 전부 어리광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어.
너도 마찬가지였던 것 아냐? 내가 줄곧 그곳에 있었으니까. 절대 나처럼은 되지 않겠다고 생각하면서 지금까지.

네가 무슨 꿈을 꾸고 있는지 들여다볼 고민도 해 봤는데, 왜냐하면 거기 내 존재가 없지 않을까 생각하니 끔찍한 기분이 들어서. 하지만 그만두려고.
영화를 보러 가자고 한 건 어느 쪽이었을까.
나만 아니었다면 너는 외롭지 않게 죽었을 텐데.

자신의 삶을, 남의 손에 맡겨버리다니 어리석은 행동이라고는 생각하고 있었지? 난 그걸 휘두르고 싶지 않아. 너처럼 이제 와서 세계를 어떻게 할 수 있을 거라고 자만하지도 않고.

그러니 네 인생은 운에 맡길게. 종이 두 장을 준비했어. 내가 붉은 표시가 된 쪽을 뽑는다면, 네가 이 글을 읽게 될 일은 없을 거야. 하지만 만약 뽑지 못한다면…그래도 이게 우주에 마지막으로 남겨진 관계인데.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 자신 따위 없으니까.
적어도 파괴하면서 끝내려고 해.

넌 한 번도 내게 상처 입을 수 있을 거라는 예상 따위 안 해봤을 것 아냐.
이유가 필요한 건 삶이 아니라 죽음이니까.

(나머지 문장에는 취소선으로 지운 자국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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