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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미션] 빈 공간

Etc/Novel

2024. 3. 31.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은 그 자체로 하나의 빈 무대가 될 수 있다. 누군가 이 빈 공간을 가로질러 걸어가고 다른 누군가 그를 지켜보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연극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 피터 브룩, 『빈 공간』


#
바람 소리가 들려온다.
흑색 암막 커튼으로 둘러싸인 베란다. 창문을 거칠게 두드리는 비. 물기 낀 나무 바닥에 깔린 러그. 거실 전체를 덮고, 솔기가 헤졌고, 실내용 슬리퍼 자국이 이곳저곳 남아 있다. 창틈으로는 한 줄기의 빛도 스며들지 않는다. 고막을 강타하는 폭우에 익숙해지면 멀리서 파도가 모래를 쓸어내리기 반복하는 음색을 알아볼 수 있겠으나, 공교롭게도 이곳엔 커튼을 걷을 손도 바다를 감지할 귀도 없다. 유일한 조명은 텔레비전이다. 음소거 상태로, 세계 각지의 오래된 기차역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흐르고 있다. 푸르스름한 빛이 모서리 구석구석에 뭉친 암흑과 혼재하며 방을 밝힌다. 희미하게. 곧 증발할 것처럼. 아침인지 밤인지, 현실인지 꿈속인지조차 알 수 없는 공간에서는 은은하게 피 냄새가 났다. 그리고 무화과 향기도…….
 
문이 열린다.
망설임 없이, 정중하게. 누군가 집 안으로 들어선다. 현관에서 우산의 물기를 털어낸 후 곧바로 거실까지 간다. 깔끔한 셔츠와 슬랙스. 어깨가 조금 젖었고, 머리카락이 단정하다. 양손은 비었다. 그는 테이블에 열쇠 하나를 내려놓고 소파에 앉는다. 열쇠에는 그 흔한 액세서리 하나 달려 있지 않고, 녹 하나 없이 반짝이며, 자물쇠를 돌리는 동안 얄팍한 스테인리스강에 옮겨붙었던 체온은 식어버린다. 그는 지갑조차 가지고 나가지 않았다. 이어서 낮은 탁자 위 이리저리 흩어진 물건들을 확인하기 시작한다. 적색 눈동자가 암흑 속 신호처럼 빛난다. 각종 영화의 비디오 테이프가 여덟 개. 테이프가 담긴 종이 상자들에 대여점 스티커가 붙어 있다. 장르에는 규칙성이 없다. 가게에 들어서서 손에 잡히는 대로 빌려온 것처럼. 영화의 제목을 다 읽은 칼리마쿠스는 짧게 한숨을 내쉰다. 일련의 동작은 저명한 화가에 의해 교정된 듯이 단정하다. 
 
동시에 카인이 외친다.
 
「컷!」
 
……처음부터 다시. 어디서 구해 왔는지 클래퍼보드를 흔들며 그가 명령한다. 위에 달린 막대를 내리쳐 달칵, 소음을 낸다. 슬레이트에는 두 사람의 이름과 오늘 날짜가 적혀 있다. 신 넘버는 1이지만 테이크 숫자는 7. 칼리마쿠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선다. 여덟 번째. 그가 현관으로 가다 멈춰 선다. 
날 밝겠어. 비도 계속 내리는데.
마음이 없어.
마음이라.
대본을 외워봐.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은, 그 자체로 하나의 빈 무대가 될 수 있다.」  
그래.
「누군가 이 빈 공간을 가로질러 걸어가고 다른 누군가 그를 지켜보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연극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리고……. 내가 집에 들어서고, 소파에 앉아서 비디오를 고른다. 영화는 카인 에덴이 고른 것이지만 칼리마쿠스는 불평 없이 하나씩 관람한다.」  
중요한 설정을 잊어버린 건 아니지?
카인 에덴이 죽었다는 설정?
그래. 너는 장례식에 다녀온 거야. 달칵. 클랩스틱이 한 번 더 울린다. 카인은 불만스러운 어조로 말하지만, 표정에 고저가 없다.
비가 내리는 장례식이라. 고전적이네. 헌화라도 하는 게 좋았을지도 모르겠지만 이 시간엔 열린 꽃집이 없어.
꽃을 사 와 주기를 바라지는 않았는데. 
알고 있어. 어차피 방치할 거잖아. 11월에 피는 건 국화나 은목서뿐이고.
오래 못 가잖니. 뿌리가 잘렸는데.
그것이야말로 네 희망 아니었던가……촬영 이야기는?
마음이란 진심일 필요가 없어. 그렇게 하다가는 모든 배우가 연기 끝에서 배역에 매몰되어 죽고 영화계는 몰락할 테니까.
과연, 조금 알 것 같아. 다시 비가 내리는 현관 앞으로 가면 되나.
……아니. 됐어. 그냥 영화나 보자. 처음부터 이렇게 할 걸.
테이프를 들고 카인이 TV 앞까지 간다. 플레이어를 조작한다. 
 
카인은 그저 칼리마쿠스가 슬퍼하길 바랐을지도 모른다. 칼리마쿠스는 울지 않는다. 그는 전문 배우가 아니며 미발생한 사건에 대해 무의미하게 가정하며 반추하지 않는다. 돌연히 시작된 영화, 거짓 장례식, 보이지 않는 유서에 대해서도 거론하지 않는다. 그는 리모컨을 들고 스피커 볼륨을 높인다. 대여점 직원이 비디오를 되감는 것을 잊어버렸는지, 영화가 도중부터 재생되지만 두 사람은 내버려둔다. 영화관의 청중이 일순 침묵하는 것처럼 빗소리조차 좀먹히는 정적이 찾아온다. 그 정적은 일 분 후에 깨진다. 카인은 불규칙하게 호흡하며 소파에서 뒤척인다. 칼리마쿠스는 테이블에 널려 있던 초콜릿 포장을 뜯기 시작한다.
아무리 좋은 영화를 경험한다고 해도, 누군가 칼리마쿠스의 삶을 모조리 훔쳐다 필름을 제작한다고 해도 그는 그것을 보고 달라질 위인이 아니다. 완성된 자신. 수미상관의 우로보로스. 그런 인생을 극본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사람 역시 존재하지 않을 테니 이것조차 미발생한 사건에 불과하다.
두 쌍의 눈동자에 가시광선이 직격한다. 



1.
2월 2일 아침 6시. 카인은 어제 절벽에서 투신할 때 함께 박살난 디지털시계의 알람을 들으며 기상한다. 시계를 호텔 벽에 내던진다. 요란한 파열음과 함께 조용해진다. 나뒹구는 태엽을 짓밟고 욕실로 가서 간단히 샤워한다. 찬물밖에 나오지 않는다. 멎지 않는 잔기침. 녹색 스카프를 목에 묶으며 계단을 내려가자면 정확히 13번째 칸에서 종업원과 마주친다. 카인이 먼저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오늘도 카밀러 차는 없겠죠?
어머, 마침 오늘 다 떨어진 참인데. 어떻게 아셨어요?
그는 대답하지 않는다. 짧게 웃으며 로비를 나선다. 단단히 굳은 눈이 걸음을 느리게 한다. 곧 폭설이 내리겠지. 카인은 예언하듯 중얼거린다. 하지만 그것은 경험의 축적이지 투시나 기대 따위가 아니다.
작은 마을이 행사 준비로 한창이다. 마주치는 사람들은 음료나 쿠키, 케이크를 권하지만 그는 거절한다. 신나는 음악이 들려와도 스텝은 경쾌해지지 않는다. 이 스카프로 저 나무에서 목을 매달아버릴까. 생각하며 말라비틀어진 나무 앞까지 걷지만 결국 지나친다. 은행나무에 가려진 작은 집. 초록색 지붕 아래 고드름이 붙어있다. 현관문에 두 번 노크한다. 반응이 없다. 다시 노크.
인기척이 나고, 느리게 문이 열린다. 
아침 일곱 시부터 누가 찾아왔나 싶었는데. 
칼리마쿠스가 카인을 내려다본다. 푸른 실로 자수가 놓인 커튼을 젖히고, 뜻밖의 손님을 대하며, 어느 정도 예상했다는 듯이 말한다. 그 예상조차 지겨워하며 카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정착하지는 않았지?
그래.
사람도 얼마 안 사는 마을이고. 한적하고. 젊은 사람은 거의 없는…….
맞아.
축제만 보고 적당히 떠날 생각이었겠지.
안 본 사이 새로운 취미가 생겼나 봐?
피아노, 유화, 스토킹 이외에도 이것저것.
바라는 게 뭐야, 카인.
나를 현관에 세워두지 마. 호텔 커피는 이제 지긋지긋해.
그제야 칼리마쿠스는 문을 마저 열고 점잖게 손짓한다. 들어와. 그는 뒤돌아보지 않고 부엌으로 향해 찬장을 연다. 서로 다른 모양의 컵 두 개를 준비한다. 알코올램프에 불을 붙이고 티백을 꺼낸다.
익숙하게 실내로 들어서며, 카인이 말한다.
다녀왔어.
보기보다 좋은 집이네, 실례할게, 가 아닌. 「다녀왔어」라는 대사에 칼리마쿠스는 짐짓 의문을 내비치지 않는다. 그저, 이곳은 분지니까 산책할 바닷가는 없을 텐데……따위를 곱씹을 뿐이다.


2.
친구분께서 병문안 오셨어요. 간호사가 커튼을 걷는다. 새로이 점적주사가 연결된 팔을 쓰다듬으며 카인은 창 너머를 본다. 손님이 들어서는 문이 아니라 창밖을 바라본다. 원목을 두드리는 것처럼 듣기 좋은 발소리가 다가온다. 상대가 보조 의자를 당겨 침대 앞에 앉는다. 카인은 창밖을 바라본다. 사이드 테이블에 꽃다발이 오른다. 파란 장미와 안개꽃을 엮었다. 그 사이에 카드가 꽂혀 있다.
카인은 창밖을 바라본다. 칼리마쿠스는 벌써 몇 달은 넘기는 것을 잊고 벽에 걸려있을 뿐인 달력을 바라본다. 
누구도 인사를 하지 않고, 의미 모를 대치 상태가 몇 분 이어지다가, 돌연, 카인이 꽃다발에 손을 뻗어 카드를 잡는다. 반으로 접힌 두꺼운 종이의 겉면에는 사랑하는 당신이 건강하길 바란다는 문구가 필기체로 인쇄되어 있다. 펼친다. 직접 글을 쓰는 곳은 백지. 카드를 내려놓는다. 그가 메마른 음성으로 뱉는다. 고마워 칼리. 저기 있는 쓰레기통에 버리면 돼.
칼리마쿠스는 묵묵하게 꽃다발을 집어 든다. 자리에서 일어나, 구석으로 가서, 쓰레기통의 레버를 밟고 뚜껑이 열렸을 때 카드와 꽃을 떨어뜨린다. 텅 빈 테이블로 돌아와, 이번에는 책 몇 권을 꺼내 올려놓는다. 여기까지는 몇 번이고 반복한 일상이었다. 수많은 계절의 헌화를 삼킨 병실. 마지막 잎새의 주인공이 된 카인. 떨어지지 않는 이파리. 떨어지지 않는 자기 자신. 더 필요한 건 없어?
아니, 괜찮아. 그 대답을 기다리며 칼리마쿠스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대본과는 달랐다.
나는 바다를 본 적이 없어.
시의 첫머리를 읊듯이 카인은 정확하고 날카롭게 발음했다. 흔들림 없는 검은 눈동자가 칼리마쿠스를 직시한다. 
바다를 한 번도 못 봤다고?
그래, 단 한 번도.
몇 번이고 이미 다녀온 것처럼 다루더니.
……가끔 그런 생각이 들어. 기도하는 것도 지쳤고, 변하는 건 없었다고.
누구에게 했던 기도인데?
자고 있던 너.
카인은 창밖을 바라본다. 이 병실에 창문은 없다. 칼리마쿠스는 카인을 바라본다. 카인과 같은 곳에서 잠을 청한 기억은 없다. 상대는 어릴 때부터 줄곧 입원해 있었고, 면회 시간은 30분을 넘을 수 없었다. 지하의 비좁은 관에서 태어나 그 모양대로 굳어져, 죽을 때까지 병증과 수면을 되풀이하는 썩은 뿌리. 멸할 수도, 살릴 수도 없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카인의 가족은 자신을 선택했다. 현상 유지 자체만으로 삶이라 불릴 수 없으니, 결국, 모든 것은 재미없는 농담에 불과하다.
그러면 오늘 보러 갈까. 즉흥적으로, 건조하게, 그는 제안한다. 직접 운전해서 병원까지 온 게 정답이었네. 그 정도의 무게로.
당장 퇴원 절차를 밟기는 어려울 텐데.
그냥 가는 거지. 어차피 너. (칼리마쿠스는 이 구절에서 잠깐 뜸을 들였다) 낫지 못할 거잖아.


3.
괜찮아.
……뭐?
괜찮아. 뛰어내려.
칼리마쿠스, 지금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네가 변호사에게 내 이야기를 한 것 알고 있어. 정신과 진단서를 조작한 것도 알고 있고. 그래도 괜찮아. 네가 뛰어내리면 나도 뛰어내릴 테니까.
그런 말밖에 못 해?
카인 에덴……. 나는 그저, 한 번쯤은 네 소원이 이루어질 때도 되었다고 생각했어. 
 
내 이름이 제외된 유언장. 변호사와의 상담. 줄어들지 않은 약. 그 전부가 나아지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의 행동은 아니었지. 내가 무엇을 더 주길 바란 거야? 얼핏 냉혹한 문장이었지만 그의 표정은 평온했다. 칼리마쿠스가 카인에게 주려고 했던 것. 그는 뒤돌아본다. 바닥에 떨어진 케이크와 부서진 유리잔. 찢어진 커튼에 피처럼 흩뿌려진 레드 와인. 포장을 뜯지도 않은 채 쓰레기통에 처박힌 선물 상자. 히스테리컬하게 어질러진 호텔 최상층 특별실의 창문은 차가운 겨울바람으로 가득 차 있다. 라디오에서는 캐럴이 들려온다. 열린 창문을 통해 눈송이가 하늘하늘 떨어져 들어온다. 추락한다. 녹아내린다. 한순간에.
 
앵글이 돌아간다. 마주 본 건물의 난간에 걸터앉아 대사를 주고받는 두 사람. 칼리마쿠스는 그때까지 줄곧 팔에 끼고 있던 장미 꽃다발을 카인 쪽으로 던진다. 그것은 건너편에 닿지 않고 바닥으로 낙하한다. 푸른 꽃잎이 산재한다. 떨어져 파괴되는 음색조차 들려오지 않는다. 카인은 아래를 내려다본다. 플랫 슈즈가 아슬아슬하게 걸린 발끝. 눈보라는 특정한 지점부터 검게 물들어, 시야에 다 들어오지 않는다. 심해의 괴물이 입을 쩍 벌린 듯한 암흑으로 추락하는 상상을 한다. 그는 공포에 질린 듯이 팔짱을 끼고, 자신의 피부를 매만지지만 다음 순간에는 아찔한 상황을 연기하는 배우인 듯 여상한 낯을 보여준다. 중요한 장면에 사운드트랙을 삽입하듯이 캐럴을 흥얼거리기 시작한다.
See, amid the winter's snow, Born for us on Earth below, See, the tender Lamb appears, Promised from eternal years…….
노래를 들으며, 칼리마쿠스는 자신의 손등에 새겨진 상흔을 만져보았다. 죽는 게 싫고, 이렇게 대화하고 싶은 것뿐이라면 나는 돌아갈게.
가지 마.
그럼 떨어질래?
…….
 
눈이 마주친다. 칼리마쿠스는 카인이 울음을 터뜨릴지도 모르겠다고 여겼다. 상대는 울지 않는다. 다만 고장난 오르골처럼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할 뿐이다. 너는 어떻게 해야 나를 믿을래? 어떻게 해야 이 거짓 세계에서 깨어나 줄 거야? 그 문장에는 방금 불렀던 캐럴의 음조가 섞여 다소 상기되어 있다. 칼리마쿠스는 앞으로도 영원히 꺼내지 못할 말을 천천히 삼킨다. 그건, 죽음 속에서 죽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야. 이곳이 현실이며, 그리하여 잔혹하다.
 
플랫 슈즈가 떨어진다. 


4.
두 사람은 맨발로 해안가를 거닐었다. 차갑게 식은 모래의 감촉이 기분 좋게 느껴졌다. 아벨은 칼리마쿠스의 손을 잡고 파도로 이끌었다. 망설임 없이 물속으로 들어간다. 둘 다 허리까지 잠겼을 때 겨우 멈춘다.
아벨, 춥지 않아?
시간이 없어. 곧 들이닥칠 거야. 대답이 되지 않는 경고가 돌아온다. 상대는 숨기려 들었지만, 칼리마쿠스는 아벨이 조급해하는 것을 처음 마주한다는 감상을 가졌다. 물결이 사납게 몰아치고 피부가 얼음장처럼 식어간다.
무엇이 들이닥치는데?
사실 나는 너랑 이야기하면 안 돼.
누가 그렇게 말해?
봐, 왔잖아…….
엔진음이 가까워진다. 승용차 하나가 경사진 길을 뛰어내리듯 운전해 바다 앞에 선다. 헤드라이트 빛이 두 사람을 비춘다. 돌연히 무대 위로 끌려온 관객처럼, 그들은 뻣뻣하게 조명을 받아낸다. 눈부심을 막기 위해 뻗은 손 사이로 빛 알갱이가 부서져 범람한다.
내 이름은 아벨이 아냐. 나는 카인이야. 널 좋아하는 평범한 여자인 척한 것도 전부 타인이 정해준 배역이었어.
전혀 몰랐던 정보네. 그러니까, 이름 쪽은.
이 세계는 전부 거짓이야. 전부 너 때문에 만든 거라고. 여기서 나와서 날 찾아!
카인은 어두운 초록색 머플러를 벗어 칼리마쿠스의 어깨에 걸친다.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들을 소화하며, 바람에 날아가려는 천을 붙잡는 짧은 순간, 그것을 건네준 사람은 물 밖으로 뛰어가 사라져 버린다. 그는 자신의 발로 차에 올라탄다. 누군가 시동을 건다. 운전하여, 멀어진다.
 
……홀로 남겨진 이는 천천히 파도에 밀리듯 걸어 나온다. 구두를 신는다. 떠나간 사람의 발자국을 짓밟으며 걷는다. 발자국은 금방 끊어지고 타이어 자국만이 남았다. 소금기를 잔뜩 머금은 대기에 마취된 것처럼 기능하지 않던 후각이 무화과 향기를 잡아낸다. 머플러 천을 매만지던 그는 느긋하게 결론내린다.
이 세계가 거짓이라면, 남김없이 삼켜버려도 불만은 없겠지. 
동굴의 그림자 인형극이 햇빛 앞에서 무용지물이 되듯이. 검은 잉크 한 방울이 맑은 호수를 물들이듯이. 진실된 존재라면 잡아먹히지 않고 살아남을 테니까. 그렇게 해서 남겨지는 정답이라면 망설임 없이 받아들이고, 이곳을 떠난다. 다짐하는 것과 동시에 조명과도 같은 해가 수평선 위로 고개를 든다. 극적이다. 먼 곳에서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부른다.
긴 여행이 되겠네. 지금부터 이어질 악식의 연회를 가늠하듯, 칼리마쿠스는 중얼거렸다.


5.
여덟 번 남았어요!
뭐라고요?
여덟 번이요.
카인은 비틀거리며 화관을 고쳐 쓴다. 흰 원피스가 땀에 젖었다. 모네의 바닐라 스카이처럼 비현실적인 하늘색과 연보라색으로 녹아든 창공. 끝없이 펼쳐진 초원. 얇은 신발을 신어 풀과 돌의 감촉이 그대로 느껴진다. 열이 오른 피부에 바람이 스치고 찻잎을 그대로 들이키듯 지나치게 상쾌한 기분이 든다. 투박한 관악기의 곡조가 귀를 마비시키는 것만 같다. 그는 사람들 사이 이리저리 치이며 춤을 춘다. 팔을 올리고 빙글빙글 돈다. 숨이 가빠지고 꽃향기에 질식하기 직전이지만 어지럼증은 느껴지지 않는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임에도 몸이 태어날 때부터 이 순간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움직인다. 카인은 스스로 미소 짓고 있음을 깨닫는다. 흙이 맥박한다. 나무가 파동을 내뿜는다. 꺾어 달았을 터인 장미의 잎이 움츠렸다 피어나길 반복하며 호흡한다. 호수에 비가 내리며 무수한 파문을 그리는 것처럼 그 움직임들은 불규칙적으로 섞이며 하나의 음악이 된다. 선율이 심장을 강타한다. 마침내 자신의 심장이 존재함을 느낀다. 혈액이 발끝까지 닿는다. 따스한 햇볕과 잔디가 발을 간지럽힌다. 발이 존재함을 느낀다. 뺨이 붉어진다. 손으로 얼굴을 더듬는다. 아, 이곳에 내가 있구나. 악기 연주가 멈춘다. 음악은 끝나지 않는다.
함께 춤추던 이들은 남김없이 쓰러지고, 그는 이윽고 혼자가 되었다. 기묘하게도 고독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5월의 여왕이여!
 
카인은 가족에게 둘러싸여 커다란 화관을 수여받는다. 탄생의 기쁨을 모두의 눈물과 함께 나눈다. 나는 지금까지 투명한 막에 싸인 채 진짜 세계를 보지 못하고 있었어. 언제나 자기 자신을 타인처럼 적막한 방에서 지켜보고 있었어. 지금은 달라. 지금은. 그래 이 기분을 나는…….
그는 뒤늦게 칼리마쿠스를 떠올려내고, 구경꾼들이 모인 장소로 달려간다. 셔터음이 울린다.
칼리, 왜 그런 표정이야?
카인 에덴.
웃어. 내가 5월의 여왕이라잖아.
카인…….
카인은 화관에서 장미를 떼어낸다. 경련을 일으키는 근육을 닮아, 맥동하는 꽃을 칼리마쿠스의 셔츠 주머니에 꽂는다. 웃어, 칼리마쿠스.
그러나 카메라는 칼리마쿠스의 표정을 담지 않고 장면은 페이드 아웃된다.


6.
카인이 조수석으로 돌아왔다. 칼리마쿠스는 상대가 힘겹게 짐을 싣는 모습을 차창 너머로 바라보다가 뒤늦게 질문했다.
트렁크에 뭘 넣은 거야?
나.
네가 뭐?
나라고.
……출발할까. 그는 이해하기를 포기한 채로 시동을 걸었다. 차체가 부드럽게 움직인다. 탁 트인 해안가 도로를 달린다. 상대가 카 오디오를 조작한다. 드뷔시의 『달빛』이 재생된다.
 
우리가 여길 떠나기로 한 것, 좋은 결정이었어. 한참이나 수평선을 지켜보던 카인이 겨우 뱉었다. 칼리마쿠스는 카인이 이삿짐을 꾸리는 모습을 정확히 보지는 못했으나, 검고 커다란 가방 속에 알약이 든 통이 들어가지 않았다는 사실은 확신하고 있었다. 집을 나서기 직전 싱크대의 고인 물에 던져진 약병들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거처에서 사용하던 약품이 모조리 그곳에 있었다. 상대가 다시 발작적인 행동을 시작했을 때 어떻게 진정시킬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으면, 카인이 혼잣말을 이어간다.
그냥 나쁜 꿈을 꾼 것뿐이야. 눈을 감고 즐거운 일을 생각해 봐.
운전하는 중에 눈을 감을 수는 없어.
나쁜 꿈은 모든 것을 현실로 믿게 하지.
우리가 어제 동반 자살하려다 실패한 건 현실이야.
이젠 달라질 거야.
……그래?
지금까지 먼저 떠나자고 이야기하는 것은 칼리마쿠스였고, 괜찮아질 것이라는 기도는 두 사람 사이에서 금기와 같았다. 천지개벽이 일어나려는 순간 한가롭게 드라이브나 하고 있어도 좋은 걸까. 그는 말을 삼킨다. 카인이 조수석 쪽 창문을 연다. 바닷바람이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스친다. 눈을 감는다.
칼리마쿠스는 계속 운전한다. 곁눈질로, 금방 잠들어버린 듯 눈꺼풀을 내린 카인 에덴을 바라본다. 어떤 사람이건 잠들었을 때는 갓 태어난 것처럼 평화로운 분위기를 풍긴다. 그 안온은 차 정면의 유리에 무언가 세게 부딪치며 발생시키는 파열음에 의해 금방 깨져버린다.
카인이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유리를 타고 질척하게 떨어지는 핏자국을 마주한다.
칼리, 사람을 친 거야?
새였어. 
……그렇구나.
카인은 다시 출발하려는 칼리마쿠스를 제지했다. 내가 묻어주고 올게. 차 밖으로 나선 카인은 맨손으로 새의 사체를 집어 든다. 늘 손수건을 가지고 다녔을 텐데. 
 
묻어준다고 다정히 말했으나, 카인은 모래사장 쪽으로 걸었다. 모래에 묻어봤자 파도가 삼켜버릴 것이다. 내 시력이 닿지 않는 곳에서 버릴 생각인가. 어쩌면 자신 대신 새를 수장시키려는 것일지도 모르지.
답지 않게 이것저것 생각하며, 가정하며, 칼리마쿠스는 카인을 기다렸다. 상대는 곧 파랗게 질린 낯으로 뛰어서 돌아왔다. 그는 비명 지르듯 뱉는다.
제발, 빨리 가자.
 
두 사람을 태운 차가 다시 출발한다. 속력을 높였을 때, 그것은 곧 3톤 트럭과 충돌하여 산산조각이 난다.


7.
신발이 벗겨지는 것도 개의치 않고 카인은 달려 나간다. 고층 건물 비상계단을 두 칸씩 뛰어내려 로비로, 로비의 회전문을 통과해 바깥으로. 경관 두 명과 칼리마쿠스가 카인을 쫓는다. 
카인은 총을 들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하늘색과 연보라색. 바닐라 스카이.
내려다본다. 상처가 난 두 발.
그는 경관을 향해 발포한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화약과 피의 향기 속에서 그는 울부짖는다. 깨어나게 해 줘. 이건 꿈이잖아. 그렇지?
 
…….
 
카인…….
……왜?
무거워.
……못 움직이겠어. 등에 총을 맞았거든.


8.
창문이 암막 커튼으로 둘러싸여 아침인지 밤인지, 현실인지 꿈속인지조차 알 수 없는 공간. 희미한 빛을 내뿜는 TV와 2인용 소파가 있는 방이다. 역에 대한 다큐멘터리. 비가 내린다. 카메라는 구도를 돌리는 일 없이 한참이나 그곳을 비춘다. 현관문의 경첩이 비명을 내지른다.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 점프 컷으로, 우산을 접는 칼리마쿠스의 모습. 그는 정장 위에 검은 레인코트를 입었다. 코트를 벗고 문 옆의 스탠드 옷걸이에 걸친다. 셔츠에 검붉은 얼룩이 잔뜩 묻어 있다. 빈손으로 거실에 들어선다.
거실 소파에 기대앉은 카인이 그를 반긴다. 카인은 아무것도 신지 않은 발끝으로 러그의 올을 헤집는다. 칼리마쿠스의 모습을 본 그가 질문한다. 왜 그런 꼴이야?
내 피가 아니야.
응.
사람을 죽였어.
 
바람 소리가 들려온다.



#
상영은 끝났다. 기묘하게도 아직 해가 밝지 않았다. 탁자 위에는 빵 조각이 묻은 빈 접시. 샐러드드레싱. 라즈베리 잼을 담은 유리병. 포크는 있는데 나이프가 없다. 날짜가 한참 지나버린 신문과 아무도 손대지 않은 패션 잡지, 광고지와 붉게 물든 냅킨…….
영화를 다 봤네.
이제 만족해?
날이 바뀌지 않았어.
그게 중요한가.
중요해. 날이 바뀌면 작은 반전이 발생하고, 그곳에서 시간이 멈춰버리듯 끝나는 영화라서.
아직 촬영 중이었군…….
감상회를 하자. 우리의 인생을 대입해서.
난 지금으로도 만족해. 다른 사람이 될 필요는 없어.
저 중에 언젠가 일어날 미래가 있을지도 모르잖아.
글쎄, 유서를 여덟 장 더 쓸 수는 있겠군.



1.
반복되는 하루를 겪고 주인공이 정신적으로 성장하는 이야기인데, 너는 그냥 안주해 버린 것 같아.
달라질 자신이 없어.
영원히 사는 건 두려울 텐데.
달력이 넘어가지 않으니, 미래에 의한 공포조차 좀처럼 오질 않네.
그럼 이렇게 하자. 너는 수많은 2월 2일 중에서 나를 죽이는 시도는 해 본 적 없다는 사실에 착안하고 그것을 실행해. 그리고 망가진 시계와 칼리마쿠스의 반복을 그만두고 다른 곳으로 가는 거야.
어디로?
다음 영화로.


2.
좋아, 칼리마쿠스. 두 사람은 바다에 도착했어. 나는 파도가 열 번 치면 쓰러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될 거야.
너는 평생 자신이 죽을 곳을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해 왔잖아.
바다는 좋지만, 모래 위에서 몸부림치기 전에 파티라도 해 줬으면 좋겠는데.
케이크에 촛불을 붙이고?
생일처럼.
생일 축하하는 것 싫어한다며.
그럼, 크리스마스라도 상관없어…….


3.
최악의 파티야.
영화를 고른 건 너였어.
우리 과거를 직관적으로 돌아볼 수 있었던 것 같아.
추락사보다는 중독사가 낫지.
내가 죽으면 꿈에 나올 것 같아?
꿈은 현실의 연장선이니까. (만약 나온다면 어느 편이 현실인지 분간하기는 쉬워지겠네. 그는 문득 베란다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이 방에는 확실히 창문과 커튼이 존재한다. 그는 카인이 욕조에서 면도칼로 손목을 그었던 날에 대해 떠올려낸다. 칼리마쿠스가 종이봉투를 들고 돌아왔을 때, 집안의 모든 창문이 열려 있었다. 커튼은 찢어져 무대 장치처럼 바닥에 늘어지고……그래서 지금의 커튼은 새로 한 것인데……아무튼 그는 봉투에서 바게트 빵을 꺼내 냉장고에 넣어둔 후 물소리가 들려오는 욕실로 갔다. 출혈이 적었기에 구급차는 부르지 않았다.)


4.
(날씨가 점점 나빠진다. 목소리를 분간하기 어렵다.)
촬영 실수가 없었다면 죽을 때까지 한 사람의 인생을 담을 수 있었을까?
종종 무지는 행복이니까.
그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만이 뱉을 수 있는 말. 일종의 특권이지. 


5.
확실히 조증 상태일 때, 세계가 이렇게 보이는 것 같아.
너는 나를 지목할 거야?
……꽃 축제에 가 보고 싶어…….
유감스럽게도 11월이라. (칼리마쿠스의 시선이 달력으로 향한다. 동그라미로 표시된 날짜가 하나 있다. ……오늘이 무슨 요일이었지? 날짜는? 중요하지 않은가.)


6.
「이곳에서 기다릴게요. 돌아올 거죠?」
「네. 약속해요.」
돌아올 거야?
(대답하지 않는다.)
돌아와 줘.
(카인이 허공을 향해 소리친다.) 아무나 내게 돌아와.
누구라도 상관없으니까.
누구라도 상관없으니까.
내게로 돌아오기를.
창밖에 사람이 많네.
전부 죽여버려야겠어.
아무도 내게 돌아오지 않는다면.
(칼리마쿠스가 카인의 입에 초콜릿을 가져다 댄다. 초콜릿이 사라진다.)


7.
「카인…….」
「……왜?」
「무거워.」
「……못 움직이겠어. 등에 총을 맞았거든.」
「그걸 어떻게 알아?」
「글쎄……왜냐하면…….」


8.
이 작품만 이름을 모르겠는데.
흔해빠진 로맨스 영화 중 하나겠지. 신경 쓰지 마. 
연출을 위해서 생략한 부분이 많군.
죽어버린 사람의 정체라거나?
생략해서는 안 되는 정보까지 감독의 실력 부족으로 감춰진 인상을 받았어. 장면 전환을 해서는 안 되는 곳에서 시도하니 흐름이 끊어지고. 집중하기 어려운 작품이네.
신랄하기는.
범인은 금방 체포되겠지. 행인이 피해자의 비명을 들어버렸고. 살해 방법도 특출하지 않았으니.
그래서 사람이 죽었는데 영화나 보고 있는 건가.
달리 할 일도 없으니까.
달리 할 일도 없긴 해.
분명 비디오 반납일도 넘겼을 거야. 쓰레기 같은 새끼.
…….
반납일이 언제였지?
내일 처리해 둘게.



#
아무래도 너와 내가 배우일 때는 극이 성립하지 않는 것 같다. 칼리마쿠스가 한 줄로 평한다.
우리가 배우일 때는. 카인이 정정한다.
카인, 커튼 걷을게. 비가 그치는 것 같아.
그건 무대의 장막이야. 걷으면 이야기가 끝나고 말아.
이 공연의 제목은?
……『시시포스 해피(Sisyphus Happy)』?
직관성이 부족해. 관객이 의아해할걸.
『빈 공간』.
창의성이 없어.
네가 지어 봐, 그럼.
이사올 때 좋은 소파를 골랐다지만, 반나절 이상 앉아 있었으면 몸이 불편하다고 호소할 법도 한데. 카인은 다음 상영을 기다리듯 노이즈만 흘러나오는 텔레비전 화면을 응시하고 있다. 소파에 구겨진 신체가 왜소해 보인다. 고장난 디지털 시계, 주사기, 크리스마스풍의 쿠키 상자, 액자 속의 액자, 압화 책갈피, 자동차 열쇠. 여덟 장의 빈 종이. 그는 부엌에서 비닐봉투를 가져오더니 소도구들을 쓸어담는다. 다시 노이즈.
채널 돌릴까.
이 시간엔 재미있는 프로그램 안 하는 걸. 화면을 노려보며, 카인이 우물거린다. 
옷 갈아입고 올게. 
카인은 대답하지 않는다. 
칼리마쿠스는 현관 앞의 스탠드형 옷걸이에서 레인코트를 걷는다. 자신의 방으로 향한다. 옷장에서 새로운 셔츠를 꺼내고, 입는다. 혈액이 바싹 말라붙은 레인코트와, 셔츠를, 쓰레기통에 던지고, 문을 열며 부른다.
카인.
카인 에덴?
 
(대답하지 않는다.)
 
그는 소파로 돌아와 리모컨을 든다. 잡음뿐인 TV를 꺼 버린다. 시야가 암흑에 길들기까지 기다린다. 테이블을 내려다본다. 반납일을 한참 넘겨버린 비디오테이프와 보관 상자를 매치하여 하나씩 정리한다. 일곱 개.
여덟 번째 테이프가 없다. 상자도. 여덟 번째라고 생각했던 것은 초콜릿 상자일 뿐. 입안에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데, 초콜릿을 상상하는 순간 단맛이 퍼져나간다. 플레이어로 다가가 투입구를 젖혀보지만, 그곳은 텅 비어 있다. TV와 라디오는 질렸다고 말하는 사람의 표정을 떠올려낸다. 
 
「죽은 자들은 왜 돌아오는 걸까?」
 
할로윈은 지났다. 그는 답을 바라고 질문하지 않았겠지만 칼리마쿠스는 줄곧 생각하고 있었다. 미련. 이건 너무 흔한 소리지. 그러면 복수? 영화 같군.
더는 여행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서인가.
결론을 내린다. 그는 답을 말하기 위해 카인을 찾기로 했다. 제목은 그다음이다.
현관, 주방, 카인의 방, 세탁실, 다시 거실, 다시 칼리마쿠스의 방. 모두 커튼이 내려와 있어 어둡다. 찾는 상대의 이름을 더는 부르지 않고, 묵묵히 움직이는 모습은 마치 범죄 영화에서 살인마가 타겟을 찾아 헤매는 형상 같다. 아침인지 밤인지, 현실인지 꿈속인지조차 알 수 없는 공간에서는 은은하게 피 냄새가 난다……그리고 무화과 향기도……. 그는 오르골을 발견한다. 자신의 침대 머리맡에서.
오르골의 태엽을 돌린다. 수백 번쯤 들어 익숙해진 곡조. 듣지 않아도 머릿속에서 완벽하게 재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재생하지 않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삼키지 않은 초콜릿과 무엇이.
오르골을 카인의 침대에 내려놓았다. 음악이 이어진다. 턴테이블.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 CD 플레이어. 비디오. 카인의 수집품을 구경하며 칼리마쿠스는 공통 사항을 찾아내는데, 그것은 세트리스트가 끝났을 때 사람의 손으로 뒤집어줘야 한다는 점이다. 카세트테이프와 CD가 가지런히 꽂힌 책장을 살펴보다가, 의미 없이 문자 순으로 정리한다. 정리는 금방 끝난다. 책장 맨 위에 놓인, 말라비틀어진 장미 꽃다발까지 처분한 후 그는 남겨진 장소로 향한다. 소매에 푸른 꽃잎이 옮겨붙은 것은 눈치채지 못한다.
 
욕실 문은 비스듬하게 열려 있다. 문고리를 잡고 제치자 녹슨 경첩이 비명을 지른다. 욕조는 샤워 커튼으로 가려져 있고 멈춘 비 대신, 샤워기에서 뜨거운 물이 흘러내린다. 계속해서. 화각은 내내 그의 뒷모습만을 담아낸다. 따라서 아무도 칼리마쿠스의 표정을 읽어내지 못한다.
이제 사물들을 구체적으로 찍는다. 서로 같은 색의 컵, 같은 모양의 칫솔, 각종 입욕제. 핏자국이 길게 이어진 커튼. 배수구에 엉겨 붙은 살점, 뼛조각. 타일에 고인 물에서 맥락 없이 부유하는 나이프. 혼탁한 광경을 가로지르며, 불가능이라는 꽃말을 가진 장미의 꽃잎 한 장이, 떨어진다. 
무화과 향기가 진동한다. 
무화과 농장에 불을 지르기라도 한 것처럼, 그것을 모조리 집어삼키기라도 한 것처럼……. 
 
문득, 현관 차임벨이 정적을 깨트린다.
무전기 소리.
거센 노크 소리.
 
「경찰입니다. 문 여십시오.」
 
누군가 장막을 걷고 안을 들여다본다. 동시에 어디선가 클래퍼보드가 울린다.
달칵.
그리고 시간이 멈췄다. ■


1 사랑의 블랙홀
2 노킹 온 헤븐스 도어
3 인셉션
4 트루먼 쇼
5 미드소마
6 트라이앵글
7 오픈 유어 아이즈

!! 필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