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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c/Novel

2023. 6. 30.

성전을 필사하던 밤. 무심코 종이 위에 내려앉은 작은 벌레를 죽였다. 그것은 몸의 절반이 뭉개졌음에도 칠 분가량을 살아있었다. 더는 나아가지 못하는 다리를 허공에 대고 꿈틀거리면서. 나는 그것을 마저 죽여야 하는지, 내버려 두어야 하는지 알지 못한 채 무의미한 저항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결국엔 어떻게 행동했더라.
이젠 아무래도 좋겠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나는 자신의 영혼이 추악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어. 그건 네게 말했던 것처럼, 사라져 버린 기억으로부터 시작되었지. 기억이 증발한 직후, 나는 돌연히 차가운 의식 속에 내던져졌다. 태어나는 것과는 달라. 빙하 속에 갇혀 있던 화석이 갑자기 살아 숨 쉬는 것을 강요당한 거야. 삶이란 욕망과 선택의 연속일 텐데, 자신이 지금까지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위해 살아왔고 어떻게 하여 이 육체가 존재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어.
그래서 나는 언제나 의식이 없는 세계로 돌아가고 싶었다. 운명의 끝으로. 전 인류에게 주어진 자명하고 지고한 끝. 완벽한 운명이란 죽음뿐이고, 살아 있는 사람의 기억 속에 남을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죽지 않는 죽음〉이지. 성지의 긴 커튼 뒤에 숨겨진 그림처럼 말이야. 신에게 부여받은 소중한 목숨을 그런 생각 때문에 이기적으로 내던지려 하다니. 이보다 악한 생명이 있겠어?

존재하는 것이 나의 목숨뿐이라면 당장이라도 그 선택을 따라갔을 텐데, 유감스럽게도 나를 둘러싼 세계엔 너무나 많은 사람이 있었다. 내게 의무를 부여하거나, 나의 도움을 바라거나, 선망하거나, 질책하거나, 욕망하고, 사라지길 바라는 이들이 나의 모습을 지금까지도 초를 만드는 틀에 재료를 부어 넣듯 생성하며 굳히고 있다. 그 중엔 너도 있었지. 나는 네가 어떤 소재로 이루어져 있는지 늘 알고 싶었어.
하나의 초엔 밀랍이나 심지실 따위가 포함되어 있을 뿐, 그 외형에서는 불꽃을 예상할 수 없다. 하지만 마찰에 의해 초는 타오른다. 마치 만들어질 때부터 빛의 씨앗을 몸속에 품고 있었던 것처럼. 스스로 빛나는 항성이나 당연한 듯이 푸르게 개는 하늘. 바람이 불어오는 곳. 네 의지를 유지하기 위한 힘을 바라보는 것으로…만족스러웠던 나날이라고 생각해.
많은 것이 달라져 버렸지만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하지 않았어.

어제, 약이나 붕대를 사고 돌아오는 길에 이 마을에서 가장 높은 성벽에 올라가 봤어. 노을 지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세계는 멸망의 전조를 모르는 것처럼 붉게 타오르고…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에 들어오는 모든 생명에게 멸망의 근원이 심어졌다고 생각하니, 무척이나 아름답게 여겨졌으니까.
너도 같은 풍경을 볼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앞으로 할 일이 많으니까, 당분간은 만날 수 없겠네.
언젠가 이 행성이 완전히 암흑 속에 잠기기 전에 다시 만나서, 그 경치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기를 바라.

그럼 몸조심하고, 건강히 지내.
다녀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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