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미션] 빈 공간
Etc/Novel 2024.03.31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은 그 자체로 하나의 빈 무대가 될 수 있다. 누군가 이 빈 공간을 가로질러 걸어가고 다른 누군가 그를 지켜보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연극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 피터 브룩, 『빈 공간』 # 바람 소리가 들려온다. 흑색 암막 커튼으로 둘러싸인 베란다. 창문을 거칠게 두드리는 비. 물기 낀 나무 바닥에 깔린 러그. 거실 전체를 덮고, 솔기가 헤졌고, 실내용 슬리퍼 자국이 이곳저곳 남아 있다. 창틈으로는 한 줄기의 빛도 스며들지 않는다. 고막을 강타하는 폭우에 익숙해지면 멀리서 파도가 모래를 쓸어내리기 반복하는 음색을 알아볼 수 있겠으나, 공교롭게도 이곳엔 커튼을 걷을 손도 바다를 감지할 귀도 없다. 유일한 조명은 텔레비전이다. 음소거 상태로, 세계 각지의 오래된 기차역에..